나경봉은 1965년, 전설로 남을 요델클럽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1966년 전후에 절친 엄흥석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합니다.

그들은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희귀한 사진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사진들을 길잡이 삼아 까마득히 잊혀져 버린 1960년대 중반 지리산 풍경을 두어번에 걸쳐 재현해 볼까 합니다. 오늘은 해방 이후 천왕봉 정상의 최초의 표목이 언제 세워졌을까를 고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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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사진에는 두개의 인문(人文)현상이 등장합니다. 첫째가 좌측에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안내판이고, 둘째가 한가운데에 '세석봉'이라고 묵직하게 세워져 있는 표목입니다. 이것들이 각각 언제 누가 세웠는지를 정확히 규명해 보겠습니다. 나아가 나경봉이 언제 지리산을 종주했는지도 결국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저시절 지리산을 모산(母山)으로 삼는 산악회는 서쪽에는 우종수 선생이 이끄는 구례의 연하반산악회, 동쪽에는 부산경남 산악계 외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제 역사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1965년 6월 구례 연하반은, 1963년에 이어 두번째로 화엄사부터 천왕봉까지 이정표와 리본을 붙이는 엄청난 위업을 성취합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됩니다. 지금 이 사진은 작업을 끝내고 천왕봉에 있는 유명한 각자 '천주(天柱)앞에서 찍은 증명사진입니다.

사진을 유심히 보면 빨간색으로 1번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 무언가 특별한게 눈에 띨 것입니다. 이 게 바로 연하반이 붙인 안내판입니다. 루트파인더스는 저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정확히 찾아냈습니다.

사진출처: 구례소식(구례군청에서 내는 계간지)
사진출처: 구례소식(구례군청에서 내는 계간지)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1965년 구례연하반 천왕봉(1,915m)라고 적혀 있습니다!  흑백이라서 그런데요. 자전거 물받이를 펴서, 흑백이라 빨간색 페인트로 바탕을 칠하고 하얀색으로 글자를 썼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좌측 이정표에는 촛대봉이라고 적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촛대봉? 세석봉? 맞습니다 두 봉우리는 '동봉이명(同峰異名)'입니다.

나경봉의 사진을 다시 볼까요. 좌측에 있는 이정표 모양도 구례연하반이 붙인 거라는 걸 알게 되고요. '촛대봉' 관련한 글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여러 정황상 촛대봉은 구례 연하반산악회가 붙인 걸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오른쪽에 있는 '세석봉'은 구례가 아니라 부산경남산악계가 붙인 걸로 일단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꽤 흥미로운 터라 따로 기사화하겠습니다.

돌아와서, 우리는 이제 구례연하반이 6월달 1번 안내판을 붙이기 전에 이미 2번의 표목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태는 나경봉이 세석봉에서 찍은 것과 동일한 형태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국립공원 공단에서 선보이고 있는 또다른 사진 두장을 보겠습니다.

잔설이 남아 있는 가운데 다리엔 감발을 칭칭하고 추위에 떨며 세명이 곡괭이로 정상의 언 땅을 파고 있습니다. 저 시절만 해도 천왕봉 정상에는 흙이 많이 있었습니다. 

좌측 나무기둥에는 천왕봉이 뚜렷하게 그 아래에 '경상남도'라고 적혀 있는 기둥을 들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세석봉'이라는 표목을 세운 이가 경상남도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또다른 사진한장입니다. 좌측에는 안내판도 세웠는데, 첫줄에는 천왕봉이라고 적혀 있고, 맨 밑에는 경상남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표목이 1965년 6월 이전 경상남도에서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결론만 말하자면, 천왕봉에는 해방 이전에도 물론 표목이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케른이 세워져 있다가 '본격적'인 의미의 정상 표지목은 이게 처음인 걸로 추정됩니다.

사진출처: 구례소식(구례군청에서 내는 계간지)
사진출처: 구례소식(구례군청에서 내는 계간지)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구례연하반이 구례로부터 힘들게 지고 와 1963년 설치한 이 형식의 이정표를 최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과연 경상남도가 언제 표목을 세웠는지로 이어집니다. 단순히 지리산을 등반하는 것하고 '표목'을 세우는 사업은 주체와 규모, 성격이 전혀 달라집니다. 

1964년 12월 부산경남권 산악계는 지리산 칠선계곡 동계 개척 및 학술조사를 실시합니다.  신업재 김택진 김재문 최병선 박창수 성산 곽수웅, 김경열 등 부산을 대표하는 전문산악인과 대륙산악회, 대학산악부 그리고 부산지역의 학계 인사들을 총망라했습니다.

이들은 사전답사를 한 10월에는 의탄에서 칠선계곡 입구까지 안내판을 달고, 칠선계곡에서 정상까지는 12월에 안내판을 답니다.

좌측: 예비답사대 때 붙인 안내판( 의탄등산로 입구)         우측: 본 조사대 때 붙인 안내판(군선담)
좌측: 예비답사대 때 붙인 안내판( 의탄등산로 입구)         우측: 본 조사대 때 붙인 안내판(군선담)

1964년 10월 예비답사대 때와 1964년 12월 본 조사대 때 붙인 안내도의 형식입니다. 둘다 똑같은 방식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양철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색깔있는 페인트로 글을 쓴 듯합니다.

스캔의 힘을 보시라. 책에는 흐릿하던 글자들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의탄 등산로 입구, 칠성계곡입구. 부산일보사 부산산악단체'라고 적혀 있습니다.

12월 본 조사대가칠선계곡에서 '선녀탕'이라 명명하고 페인트로 쓰는 예
12월 본 조사대가칠선계곡에서 '선녀탕'이라 명명하고 페인트로 쓰는 예

그러나 정상에서는 가공할 추위와 폭설에 시달려 칠선계곡 쪽 통천문에 페인트로 '칠선계곡'이라고 적고 각자도생으로 탈출하듯 법계사쪽으로 하산합니다.

1964년 두번의 답사에서 시도된 안내판은 이런 형식입니다. 

이것은 한눈에 보아도 세련되고 품위있습니다. 그 당시 또는 그 이전에 작업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그 시절 천왕봉에는 흙이 많았습니다. 서울치대산악회 OB 이병태는 1967년 11월 제1회 서울대산악회 연합등반때 천왕봉을 찾고 이렇게 남깁니다.

나는 그해 여름 등반 때 정상 케른 옆에다 묻어놓고 갔던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빨간 1원짜리 지폐 한장을 조그만 병에다 넣어 깊숙히 묻어 두었던 것이다.

많은 대원들이 보는 가운데 열심히 돌무덤과 흙속을 파헤쳐 뒤지다가 드디어 그 병을 찾았다.

 

'깍두기로 통하는 나(1978)'에서

이제 김경렬 선생(1917~1995)이 등장할 때입니다. 그가 쓴 역작 지리산1(1987)과 지리산 2(1988)의 강렬한 표지에 걸맞게 내용도 대단합니다.

책 앞부분에 '천왕봉에서 본 중봉"이라는 사진이 있는데, 여기도 똑같은 형식의 표목이 있네요. 자세를 가다듬고 책을 살피게 됩니다.

2권 말미에는 '칠선계곡 등반로 개척 및 학술조사 등반대의 현지보고'라고 당시 부산일보에 기고했던 글이 부록으로 있습니다.

천왕봉 정상에 서서 그는 '다가오는 3월쯤에는 여기에 본격적인 안내표지판을 다는 과제(작업)이 남아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말미 저자소개란에는 '1965년 경남도 후언 지리산 등반로 안내판 설치 주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리산 정상의 경상남도가 적혀 있는 표목은 1965년 3월경에 세워졌다는 겁니다. 이상 증명 끝. 

두 이정표가 그래도 반듯하게 서 있는 걸 보면 나경봉은 아마 1966년 전후에 지리산을 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람 손이 무섭다고 1968년은 아닐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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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경상남가 1965년 세운 표목과 안내판은 어떤 종류였었을까요? 책을 보면 그들은 법계사에서 올라 천왕봉에서 세석산장을 거쳐 칠불사- 신흥- 쌍계사 쪽으로 내려온 걸로 보입니다. 함양 백무동을 제외하고, 경남권역을 총괄하는 거죠.

지붕을 씌운 오각형 형태의 명소 소개판이 하나입니다. 이 모양은 위에서 보듯 천왕봉에도 소개판으로 있습니다.

저자 설명에는 1964년 12월 11일이라고 적혀 있는데 기억의 오류라고 보여집니다. 

김경열은 기자입니다. 따라서 날짜와 함께 누가 촬영했는지도 꼼꼼히 적고 있습니다.

네모모양의 이정표와 화살표 모양의 이정표 두가지가 있네요. 모두 경상남도에서 세웠다고 하단에 적혀 있습니다.

정상에는 표목과 함께 이렇게 이정표도 있네요. 표목은 중봉, 천왕봉, 세석봉에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석봉에도 있었을 듯 싶고, 이렇게 중요한 부분에만 세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 던질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김경열은 왜 하필이면, 이런 형식으로 안내판과 정상표목을 만들었을까요? 궁금하지 않는지요?^^

김경열은 일제 말기 만주에서 통신사 기자로 근무했습니다. 그 시절 금강산 탐승단원 인솔 2회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금강산 비로봉에는 이렇게 두종류의 표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금강산에서 이를 눈여겨 본 것입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요^^. 일본은 그때도 지금도 길에서나 산에서 이런 식으로 안내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식민지시기에 청춘을 보낸 이가  1965년 '정식'으로 안내도를 만들려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더 냉정한 사실을 말하자면, 불과 얼마전까지, 어떤 곳은 지금도 북한과 우리나라는 이런 식으로 표목을 만드는 곳이 있습니다. 심지어 남원시에 있는 김개남 동학농민주둔군지의 표목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동학을 기념하는 표목은 이렇게 세우면 안된다고 봅니다.

지금 이 사진은 1938년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리산을 찾을 때 천왕봉의 모습입니다. 여기에도 표목이 있군요.^^

 

이렇게 해서, 나경봉 선배님의 사진 한장을 실마리 삼아, 1965년 2~3월에 천왕봉 정상에는 구례 연하반에서 세운 이정표와 함께 경상남도에서 세운 표목과 이정표 그리고 안내판이 있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나경봉, 엄흥석 그리고 송준호는 요델클럽에서 삼총사로 불렸습니다. 그 중 엄흥석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합니다. 종주코스를 적시하고 있지는 않은데, 대체로 1964년 12월 개척한 칠선계곡에서 시작하여 노고단으로 나아간 걸로 추정됩니다.

은 1969년 여름 천불동 계곡에서 비운에 사라집니다. 그를 기려 '석주길'이 생겨난 건 산악계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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